대한민국 여자 골프 레전드
한국 여자골프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40년도 되지 않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대 투어로 성장했고 세계무대를 장악하면서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여자골프의 전성시대를 이끌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남긴 전설들의 발자취를 돌아봤다.
전설이 된 개척자 구옥희
1978년, 한국프로골프협회 내 여자프로부가 설립됐다. 그리고 프로테스트를 통해 4명의 여자 프로골퍼가 탄생했다. 한국여자프로골프는 이렇게 조촐하게 출범했다. 구옥희(1956~2013)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던 여자골프에서 군계일학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구옥희는 골프장 캐디로 일하면서 골프를 배웠다. 남다른 실력을 보이면서 프로골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1978년 경기도 양주의 로열 골프장에서 열린 프로테스트를 통과하면서 새 인생을 걷게 됐다. 프로 무대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1979년 쾌남 오픈을 시작으로 1980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까지 5개 대회를 모조리 휩쓰는 등 발군의 실력을 펼쳐 국내 여자골프의 일인자로 우뚝 섰다.
국내에 안주하지 않았다. 1983년 일본으로 눈을 돌리면서 이때부터 '선구자'이자 '개척자'로 자신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 아피타 서클K 선크스 레이디스까지 25승을 거두면서 여자골프 역사에 차곡차곡 이름을 남겼다. 많은 골프팬들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의 첫 우승자를 박세리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선수로 LPGA 투어에서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주인공 역시 구옥희다.
1988년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열린 스탠더드 레지스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LPGA 투어 한국선수 1호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골프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88서울올림픽과 겹쳐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전설은 이제 진짜 전설이 됐다. 2013년 7월 일본에서 훈련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면서 골프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구옥희가 남긴 기록은 한국여자프로골프의 역사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프로 통산 44승(국내 20승, 일본 23승, 미국 1승)이라는 대기록을 남긴 구옥희의 골프역사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원조 골프여왕 박세리
박세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맨발의 기적’이다. 1998년 7월. 뜨거웠던 여름밤을 더욱 뜨겁게 달궜다. 당시 국민들은 IMF 시름으로 고통받았다. 박세리는 미국 위스콘신주 콜러의 블랙울프런 골프장에서 열린 US여자오픈에서 태국의 제니 추아시리폰과 92홀(정규 72홀 연장 20홀)까지 이어진 혈투 끝에 우승 트로피를 번쩍 들어 올렸다. 심금을 극적인 명승부였고 IMF의 고통을 날리는 희망의 우승이었다.
특히 연장 18번 홀은 기적이었다. 티샷이 워터해저드 근처로 떨어져 위기를 맞았다. 이 홀에서 지면 우승은 물 건너가는 상황. 박세리는 양말을 벗고 워터해저드로 들어간 뒤 멋진 트러블샷 으로 공을 쳐 냈다. 세계가 놀란 감동 어린 명장이었고, 박세리는 이 하나의 샷으로 ‘맨발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극적으로 동타를 이룬 박세리는 재연장에 들어갔고, 서든데스 방식으로 치러진 2차 연장 두 번째 홀에서 버디를 잡아내며 역전 드라마를 썼다.
그것은 ‘박세리 시대’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해에만 4승을 거머쥔 박세리는 1999년 4승, 2001년 5승, 2002년 5승을 따내면서 당당히 세계무대를 상대로 한국 여자골프의 위상을 드높였다. 박세리의 성공은 국내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는 세리키즈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박세리를 보고 골프를 시작한 1988년 전후 세대가 바로 세리 키즈의 주역들이다.
2007년, 박세리는 마침내 ‘전설’이 됐다. LPGA 투어 입성 10년째를 맞은 박세리는 시즌 두 번째 메이저대회인 LPGA 챔피언십 1라운드를 마친 뒤 스코어카드르 접수하는 순간 명예의 전당 입회가 확정됐다. 이때까지 메이저 대회 5승 포함 23승(통산 25승), 2003년 베어트로피(최저타수상)를 수상한 박세리는 마지막 남아 있던 10년 이상의 경력을 채우면서 새로운 전설로 이름을 올렸다. 40년의 역사에서 명예의 전당 가입 영광을 누린 24번째이자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였다. 박세리는 골프의 불모지 한국을 세계 1등으로 만든 '영웅'이다. 그렇기에 골프팬들은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골퍼로 서슴없이 '박세리'를 떠올린다.
여제가 된 신지애 그리고 박인비
박세리의 뒤를 이은 ‘세리 키즈’는 세계 최강이 됐다. 그 맨 앞에는 신지애와 박인비, 최나연이 있다. 2005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마추어 신분으로 KLPGA 투어 SK 인비테이셔널 우승을 차지하며 프로가 된 신지애는 단숨에 국내 여자골프를 평정했다. 역대 이렇게 대단한 선수는 없었다. 그는 모든 기록을 갈아 치웠다. KLPGA 한 시즌 최다우승(2007년 9승), 연간 최다 우승(2007년 10승), 시즌 메이저 최다 우승(2008년 3승), 통산 최다 우승(20승 • 구옥희와 타이), 최소 평균타수(69.72타) 등 아직도 깨지지 않는 기록들이 수두룩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2010년 미국 LPGA투어로 무대를 옮긴 신지애는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 선수 최초로 상금왕이 됐고, 한국 첫 LPGA 상금왕으로 등극하는 등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신지애의 기록행진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4년 돌연 일본으로 무대를 옮긴 신지애는 6월 19일 JLPGA투어 니치레이 레이디스에서 통산 45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전설’ 구옥희(44승)를 뛰어넘으며 한국 여자골퍼 최다승 기록을 새로 썼다
신지애의 나이는 아직 28세 불과하다. 새 역사를 향한 신지애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올해 한•미•일 상금왕 등극이라는 전인미답의 기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6월 9일. 한국 여자골프에는 또 한 명의 전설이 추가됐다. 박인비가 박세리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LPGA 명예의 전당에 가입하며 세계여자골프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박인비는 일찍부터 여자골프의 기대주로 평가받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골프채를 처음 쥔 그는 주니어 무대를 평정하며 독주했다. 속된 말로 “박인비가 나오면 대회에 나가나 마나”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이때부터 박인비의 목표는 미국을 향했다. 그리고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국으로 골프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도 박인비의 활약은 대단했다. 2002년 US걸스주니어 챔피언십우승, 2003년 US여자아마추어선수권 4강에 오르며 차세대 스타로 주목받았다.
2008년 LPGA 투어로 데뷔한 박인비는 루키로 US여자오픈을 제패하며 두각을 보였다. 당시 나이 19세11개월로 이 대회 최연소 우승자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박인비는 이후 긴 슬럼프에 빠졌다. 골프를 포기하려고 마음먹었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긴 고통을 참고 견뎌낸 박인비의 앞날엔 영광이 찾아왔다. 다시 우승하기까지는 4년1개월이 걸렸다. 2012년 에비앙마스터스 에서 투어 2승째를 따내며 '박인비시대'의 개막을 예고했다. 이후 박인비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극강’의 골프여제가 됐다.
2013년은 최고의 해였다. 나비스코 챔피언십 우승 뒤인 4월15일 마침내 세계랭킹 1위로 등극했다. 그리고 LPGA 챔피언십에 이어 US여자오픈까지 3연속 메이저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63년 만에 메이저대회 3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아쉽게 그랜드슬램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한국인 최초로 LPGA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고 당당히 ‘골프여제’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2015년에도 5승을 수확한 박인비는 그해 베어트로피를 수상하며 LPGA 명예의 전당 입회 기준인 27점을 모두 채웠다. 그리고 6월9일 PGA 위민스 챔피언십에서 투어 10년째 활동이라는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며 박세리에 이어 9년 만에 명예의 전당에 가입했다.
한국여자골프의 전성기는 아직 시들지 않고 있다. '선구자' 구옥희, '개척자' 박세리의 뒤를 이어 신지애, 박인비가 바통을 이어받으며 전설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세계 최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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