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골프 브랜드는 평소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생소한 것들이 많지만
나이키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남녀노소 모두가 알고 있는 나이키
독특하고도 강렬한 로고를 갖고 있는 나이키는
현 지점 지구 최고의 스포츠브랜드다.
이 기업을 탄생시키고 성장시킨
두 사람이 있는데
필 나이트와 빌 바우어만은 원래 달리기를
좋아했던 육상선수와 육상코치였다.
필 나이트는 1960년대 오리건대학 재학시절
일본을 여행하던 중에 국제대회에
출전하고 있던 에티오피아의
아베베가 착용했던 런닝화
오니츠카 타이거(아식스의 전신)에
주목하게 된다.
이 우연한 한 순간이
향후 세계 스포츠용품업계의 운명과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뀌게 될 줄은
당시 아무도 몰랐다.
수소문 끝에 이 신발을 미국으로 수입해
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코치였던
빌 바우어만에게 제안해
블루리본 스포츠라는 회사를 세운
필 나이트는 운동화 판매상이 된다.
3년 뒤 일본 본사와의 계약만료로
사실상 오니츠카 타이거를 따라한
신발을 만드는데 그 브랜드가
바로 나이키다.
규모는 작았지만 소속 직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던 창업주 필나이트.
함께했던 팀원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신발의 브랜드와 로고를
얻게 되는데...
나이키 브랜드의 마크는 포스터와
전단지작업을 담당하던 여직원
캐롤린 데이비슨(Carolyn Davidson)이
브랜드명은 신발 판매를 담당하던
직원 제프 존슨가
꿈에 본 승리의 여신 니케를 모티브 삼아..
미국식 발음인
나이키(NIKE)로 명명한다.
창업초기 평소 육상분야에 두텁게
쌓아놓은 인맥을 활용해 잠재력있는
육상선수를 자사의 간판모델로 내세워
신생브랜드로서 재미를 본 나이키는
이후 스타마케팅에 집중한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오니츠카 타이거를 모작한
나이키 코르테즈를 오마쥬한다.
1984년 당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
재학 중이던 전도유망한 한 농구선수와
전속계약을 맺는데...
마이클 조던이었다.
백넘버 23번.
프로농구팀 시카고 불스에서
나이키를 신고 말 그대로 날아다니던
그를 사람들은 에어 조던이라고
불렀고 그는 주 종목인 농구를 넘어
스포츠사에서 신화적 존재가 된다.
나이키 성공신화를 영화로 만든 영화 '에어'
마이클 조던과 함께하며 엄청난
사세확장을 경험한 나이키는
10여년 뒤 골프에서 또 한 번의
초대형 계약을 성사시키는데
바로 타이거 우즈였다.
타이거 우즈
나이키 골프 레전드 CF
스포츠 용품회사로서 나이키는 다양한 제품을 생산, 유통시키고 있었지만 골프부분에서는 의류와 신발 등에 국한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이 시점에 골프계를 뒤집어놓을 가장 강력한 스타성을 지닌 투어프로를 자사의 대표전속모델로 내세운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여타의 골프 브랜드들과 달리 나이키는 골프용품업계에 발을 들여놓는 방식과 규모부터가 남달랐다.
우선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절대로 망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은 이제 막 시작하는 브랜드로서 대단히 유리한 부분이었지만, 역으로 바로 이점이 향후 나이키 골프의 발전과 시장 확대에 걸림돌로 작용되기도 했다.
신발, 스포츠웨어, 각종 용품 등 육상부터 각종 구기스포츠에 이르기까지 온갖 연관 상품을 선보이며 세계 최고의 스포츠브랜드로서 군림하던 나이키가 왜 골프에서 지존의 자리로 오르지 못한 것일까?
1997년 나이키가 5년간의 스폰서십비용으로 타이거 우즈를 붙잡은 금액은 현재 기준으로도 엄청난 4,000만 달러였다. 환율 1,300원을 기준으로 5백 2십억 원에 이르는 돈인데 타이거 우즈는 프로데뷔와 동시에 투어 상금과는 별개로 나이키로부터 매년 100억 이상을 지급받은 셈이다.
타이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이키로고로 무장을 했지만...
정작 그가 사용할 클럽과 볼은
나이키가 아니었다.
아니, 나이키는 제품 자체가 없었다.
당장 골프공부터 제작에 착수했지만 기술과 경험이 부족했던 나이키는 브리지스톤 골프에서 골프공개발을 담당해왔던 히데유키 록 이시히를 스카우트 해온다.
골프공에 관한한 또 다른 한 시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 록 이시히는 브리지스톤에서만 12년 나이키와 15년을 일했던 베테랑 볼 개발자다. 그는 액체골프공인 와운드볼(발라타볼)의 시대를 끝내고 현재의 솔리드 코어 볼의 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골프공은 이렇게 세계 최고의 개발자를 책임자로 앉히는 것으로 일단 마무리를 지은 나이키는 이번에는 톰 스타이츠라는 클럽 마스터와 그가 운영하던 골프 클럽 장비 엔지니어링 회사(Impact Golf Technologies)를 통째로 인수한다.
당시 톰은 벤 호건 골프사(社)에서 클럽 개발을 담당하던 핵심 책임자출신으로 PGA 투어에서 200회 이상 우승한 기록과 4번의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클럽을 제작한 이력을 보유하고 있는 베테랑 클럽 제작자였다.
텍사스 포트워스에 있던 이 골프클럽연구소를 인수한 나이키는 맛있는 것을 굽는다는 의미의 디 오븐(The Oven)이라는 명칭으로 간판을 바꿔단다.
자금력이 바탕이 된 엄청난 투자와 인력확보는 곧바로 가시적인 성과를 내게 되는데 1998년 특성이 각기 다른 4개의 나이키골프공을 시장에 한꺼번에 선보이게 되었고, 2001년에는 데이비드 듀발이 나이키 클럽으로 디 오픈에서 우승컵을 거머쥐면서 메이저 대회 챔피언이 사용한 클럽으로 데뷔하는데 성공했다.
작아져가는 나이키 골프
2000년 6월~ 2001년 4월
타이거 우즈가 4대 메이저 대회에서
전무후무한 연속우승을 거두며
타이거 슬램을 달성했을 당시에
사용된 골프공이
바로 이 나이키 골프공이다.
이처럼 골프용품시장에 새바람을
일으키던 나이키였지만
2016년 골프 장비 사업에서
철수할 것을 공식발표하기에 이른다.
시작은 빠르고 화려했지만
골프에서 나이키 골프클럽의
지배적인 시장 확대는
결코 녹록치 않았던 것이다.
또한 미국 골프 인구가 줄고 있었다.
치열한 경쟁,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
혁신을 넘어선 파격적인 디자인,
과도할 정도로 넘치는 마케팅...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이키는 스스로가 너무나
강력한 존재였다는 점이
골프브랜드로서의 확장성에
걸림돌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8년 골프용품업계에 데뷔했던
나이키 골프는
타이거 우즈와 미쉘 위라는
걸출한 스타들을 앞세워
대대적인 브랜드마케팅을 시작
타이거 우즈와는 최근까지도 끈끈하게
유지는 해오고 있었지만..
얼마전 이별했다.
타이거를 간판으로 내세웠던 나이키는 부족함을 느꼈던 것인지...
2013년에 로리 맥길로이와도 10년간 2억 달러에 메인 스폰서계약을 체결하며 미국과 유럽 양대륙을 대표하는 최고의 골퍼 두 명을 자사의 메인모델로 한꺼번 에 내세우는 능력(?)을 보여준다.
타이거 우즈와 로리 맥길로이
나이키가 골프부분에 쏟아 부은 자금과 규모는 이처럼 실로 엄청났음에도 나이키 골프용품의 지배력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타이거 우즈가 전대미문의 대기록을 세워나갈 때에도 나이키볼의 시장점유율은 최대 6.6%에 그쳤으며 골프채 역시 파격적인 디자인에 혁신적인 기능을 탑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평정할 만한 빅히트작이 없었다.
논란이 많았던 한 클럽을 선보였는데
사스콰치 스모 스퀘어 드라이버다.
나름의 준비 끝에 선보인 이 드라이버의 헤드는 원형이라는 통념을 깨고 이름처럼 사각형(스퀘어)의 헤드를 갖고 있었고 놀라운 관용성(직진성능)을 보여주었지만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타구음으로 골퍼들로부터 터부시되는 클럽으로 단단히 낙인이 찍힌다.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나이키골프의 용품비즈니스는 절대적인 존재였던 타이거 우즈와 함께 부침을 거듭하게 되는데, 특히 2009년도부터 불거진 섹스스캔들의 여파는 그를 페르소나로 내세웠던 나이키에게도 적잖은 부담이었다.
아울러서 이 무렵부터 타이거는 각종 부상에 시달리며 추락에 가까운 순위하락을 경험한다. 시련의 시기를 함께하며 그 나름의 의리(?)를 보여줬던 나이키골프였지만 상징과 이미지가 남았을 뿐 실속은 없는 세월이었다. 2010년과 2011년 타이거 우즈는 최악의 시즌을 보내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나이키골프의 수익성도 덩달아 최악을 기록하게 된다. 골프를 전문으로 취재하는 미국의 기자들과 분석가들은 나이키골프의 부진을 절심함이 필요 없을 만큼 이미 강력했던 브랜드파워에서 찾기도 한다.
마케팅과 신제품 발표회 등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지만 장비연구와 개발에 있어 기존의 골프 브랜드처럼 신중하고 보수적인 접근보다는 혁신을 넘어선 파격을 선보인 것에 기인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골프를 넘어서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입장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광고를 통해서 그간에 보여줬던 나이키의 메시지는 안주하고 타협하기보다는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을 설파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운동화 소매점에서 결국 지구촌 최고의 스포츠기업이 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과정 또한 그렇다.
클럽과 각종 장비에 사용된 색채도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검은색 계열을 탈피해 선명한 붉은색과 노란색, 연두색등 과감한 총천연색 적용을 마다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던 나이키골프는 결국 2016년에 클럽과 볼 제조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데..
보수적인 골프업계에서 나이키는 꿋꿋하게(?) 자신들만의 길을 걸어갔지만 결국은 매출부진과 시장 확보에 실패하면서 스스로 철수를 결정한 것이다.
“골프신발과 의류에서 우리는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20년간 계속해서 클럽과 용품부분에 자금을 쏟아 부은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 필 나이트 -
골프용품제작 중단을 결정했을 당시 시가총액 1,000억 달러가 넘던 나이키에게 골프부분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3% 내외에 불과했는데, 그간에 펼쳐온 마케팅과 투자에 비해서 성과는 초라했고 이에 따른 경영진의 결정은 빠르고 냉정했다. 자진해서 사업철수를 결정한 나이키였지만 지금 현재도 PGA프로들에 의해 다양한 모델들이 투어에서 사용되는 모습이 종종 목격되고 있다.
더 이상 스우시로고가 새겨진 클럽을 시장에서 만나볼 수는 없지만 이대로 끝이 아니다라는 소식들이 미국의 스포츠 매체에 의해 이따금씩 기사화 되고 있기는 하다. 여전히 골프신발과 의류부분에서는 관련 상품들이 판매 중에 있고 나이키의 브랜드가치는 여전히 막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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