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만으론 살기 팍팍”
“노후에 연금에만 기대서 사는 건 점점 어려워집니다. 일본은 퇴직 후에도 남녀가 모두 일해서 생활비에 보태는 것이 당연한 시대로 변하고 있습니다. ”
일본 민간 연구기관인 ‘리쿠르트웍스연구소’의 사카모토타카시(坂本貴志) 연구원은 이달 초 본지 인터뷰에서 “고령 취업자 10명 중 6명은 정년 후 일자리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생활한다”면서 “현역 때보다 수입은 크게 줄지만 그 대신 업무량이나 책임, 인간관계 등 스트레스가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카모토 연구원은 지난해 정년 후의 진실 15가지를 담은 책 <진짜 정년후>를 펴내 일약 스타가 된 인물이다(한국 미출간). 히토츠바시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후생노동성에서 일했다. 공무원 시절엔 내각부 관청 이코노미스트로 ‘경제재정백서’를 집필했다.
지난 7일 일본 도쿄 금융가인 마루노우치(丸の内)에 위치한 회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1시간에 걸친 인터뷰는 마치 예언의 수정구슬을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했다. 대한민국의 10년 후를 예고하는 미래 키워드가 곳곳에 숨어 있었다.
일본의 정년 후 삶이 궁금하다.
“과거 은퇴자들은 연금을 일찍, 그리고 많이 받아서 노후 생활에 큰 걱정이 없었다. 지금은 정반대 상황이다. 연금 개혁 이후 연금 정상 수령 나이는 60세에서 65세로 늦춰졌고, 연금 수령액 역시 고령화·저출산 여파로 계속 줄어들고 있다(※일본은 연금을 개혁해 경제 상황에 맞춰 연금액 조정). 그러자 정년이 지났어도 노동 시장에 여전히 남아 일하는 고령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2010년만 해도 70세 남성의 35%만 일을 했지만, 2020년엔 전체의 46%가 일하고 있다.”
연금만 갖고 노후에 살긴 어려운가.
“올해 프랑스에서 연금 개혁 관련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을 정도로, 연금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민감한 이슈다. 어느 나라 국민도 연금 제도가 불리하게 바뀌는 걸 원치 않는다. 하지만 예전보다 더 오래 사는데 연금액을 매년 높여가면서 지급하면 재정이 버티지 못한다. 이에 대한 대안은 시니어 일자리다. 정부는 연금액이 줄어든 고령자들이 생계에 곤란을 겪지 않도록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한국은 청년 일자리도 부족한데...
“일본도 예전엔 ‘노인이 청년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류의 논쟁이 있긴 했다. 실업률이 높아서 소수의 일자리를 놓고 세대 갈등이 심했다. 하지만 지금 일본은 저출산으로 일손이 부족하고 실업률은 역대급(약 2.5%)으로 낮아졌다. 일자리가 구직자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일자리 관련 세대 갈등은 거의 없다. 한국은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중이 18% 정도로 지금은 일본보다 낮지만, 출산율이 0.7명대로 낮기 때문에 10여년 후엔 일본과 비슷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일하는 70대, 10명 중 6명이 만족
시니어 일자리는 월급이 작지 않나.
“현역 때 직위가 높았던 사람들은 정년 이후 확 줄어든 월급에 당황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적응해 가고, 나이가 들수록 직업 만족도가 전반적으로 높아진다. 정년 후 일자리는 스트레스가 대폭 줄어들기 때문이다. 현역 시절처럼 업무량이나 책임, 권한, 대인 관계 같은 것으로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다. 60세 이상 취업자의 65%가 “업무 관련 스트레스는 크지 않다”고 답한 후생노동성 조사도 있다.”
고령취업 만족도가 높다니 놀랍다.
“일본 취업 실태 조사(위 그래픽)를 보면, 퇴직 전후로 직업 만족도가 급상승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신입사원 시절에 비교적 높았던 직업 만족도는 점점 낮아져서 50세 전후에 바닥(35.9%)을 찍는다. 하지만 그때부터 다시 만족도는 높아져서 60세 취업자의 45.3%, 70세 취업자의 59.6%가 일에서 성취감을 느낀다.
중요 직책에서 밀려나 저연봉자가 되면 직업 만족도가 낮아질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정반대인 것이다. 정년 이후엔 직업에 대한 가치관을 180도 바꿔서 눈을 반짝이며 적극적으로 일하는 취업자들이 늘어난다.”
직업관이 어떻게 바뀐다는 건가.
“20~30대엔 일에서 성취감과 보람을 느끼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회사 다닌 날보다 다닐 날이 짧아진 50세 전후엔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지?’하면서 의기소침의 정점을 찍게 된다. ‘직업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런 격동의 50대에 인생의 전기(転機)가 찾아온다.
리쿠르트웍스 연구소에서 고령 취업자 실태를 조사했더니, 중년엔 ‘승진과 명예, 고연봉’과 같은 가치관이 중요했지만 60대 이후엔 ‘사회에 공헌하기’나 ‘신체 움직이기’, ‘생활과의 조화’와 같은 가치관을 더 중시하게 된다.
정년 후엔 어떤 일을 해야 하나.
“정년 후에는 체력과 기력이 모두 떨어지기 때문에 노동 시간은 짧고 책임은 적으면서 스트레스가 없는 일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걸 ‘작은 일자리(小ちい仕事)’라고 부른다. 건물 보안 관리나 요양시설 셔틀 운전처럼 아주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일상 생활에서 없으면 안 되는 일들이 대표적이다. 농업도 고령자들이 많이 종사하는 일자리인데, 겸업 삼아서 작게, 자가 소비 목적으로 하는 정도가 적당하다. 정년 후엔 오래 일한다고 해서 급여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퇴직금을 받는 것도 아니므로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블랙기업은 피하는 게 좋다.”
“정년 후엔 NO스트레스 직장 찾아야”
‘작은 일자리’로 얼마나 벌면 되나.
“퇴직한 이후에도 현역 시절만큼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건 현실적으로 어렵고, 저항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통계를 보면, 퇴직 후 일자리는 월 소득 10만엔(90만원)이면 충분하다. 퇴직한 65~69세 고령부부의 생활비는 대략 월 30만엔(270만원) 전후다. 65세 이후엔 연금 등으로 20만엔 정도 수입이 생기므로, 10만엔 정도가 부족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정년 후 ‘작은 일자리’는 바로 부족한 10만엔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다. 가계 적자가 심해지는 65~69세도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다.”
일본엔 그런 ‘작은 일자리’가 많은가.
“일하는 고령자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이다. 60세 남성의 79%, 65세 남성은 63%, 70세 남성은 46%가 일을 하고 있다. 퇴직금 액수가 예전보다 줄고 생활고 때문에 늘어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노인 일자리가 많아졌다는 의미도 된다. 현재 일본은 일손이 모자라서 건강한 고령자들이 밖에 나와 일해주길 바라고 있다. 임금 환경도 나아지는 중이다. 정규직 임금은 수십년째 오르지 않았지만 단시간 근로자 평균 시급은 10년 전에 비해 20% 이상 올랐다. 앞서 말한 ‘월 10만엔’을 벌기 위해선 하루 7시간, 주 3일 정도 일하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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